[G선상의 아리아 (Air)를 50초 정도 삽입] 우리에게는 "G선상의 아리아" 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곡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중 아리아 혹은 에어(Air)라는 제목을 가진 음악이죠. 바흐는 이렇게 친근한 선율에서부터 심오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악곡과 수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했던 바로크 음악의 대가입니다. 후대 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바흐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현대에 와서 그의 음악은 재즈를 비롯해 다양한 스타일로 편곡되는 등 더욱 폭넓은 사랑과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
바흐는 독일어로 시내를 뜻합니다. 그래서 베토벤이 "바흐는 시내가 아니라 바다다" 라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죠. 이 말처럼 작곡가 바흐의 위대함을 정확하게 잘 표현한 말도 없을 겁니다. 바흐의 음악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요, 그 때문에 바흐가 타계한 지 250년도 더 지났지만 그가 창조한 거대한 음악의 바다는 지금도 마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적셔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흐의 사위이자 제자였던 아그리콜라가 남긴 글은 더욱 가슴에 남습니다. "그리스에는 단 한 사람의 호머가 있었으며 로마에는 단 한 사람의 버질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에는 단 한 사람, 바흐가 있을 뿐이다. 그에게 비견할 음악가는 온 유럽을 통틀어도 찾을 수 없고 장래에도 그를 능가할 사람은 결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 버질 :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 [Publius Vergilius Maro] 아그리콜라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후대 모든 음악가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유일한 작곡가가 바로 바흐였으니까 말이죠. |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탄생시킨 바흐 가문은 음악가 집안으로 유명합니다. 16세기부터 2백여년에 걸쳐 거리의 악사, 오르간 주자, 궁정음악가 등 50여명의 음악가를 배출했으니까요. 바흐의 아버지는 아이젠나흐의 유명한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흐 였는데 바흐는 1865년 3월 21일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한편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공부하면서는 넉넉치 않은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성가대원으로도 일했죠. 그런데 일찍이 부모님을 모두 잃게 되자 바흐는 큰 형 요한 크리스토퍼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형에게서 음악을 배웠던 바흐는 순식간에 형이 가르쳐 준 곡들을 익혔습니다. 어린 동생의 뛰어난 재능에 형인 요한 크리스토퍼는 분명 질투심을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형은 동생 바흐에게 프로베르거, 케를, 파헬벨 같은 당대 거장들의 악보를 베끼지 못하게 했고 그러자 바흐가 몰래 달빛 아래에서 수많은 악보를 익히고 필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
형이 결혼을 해서 가족이 늘어나자 아직 15세 밖에 되지 않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1700년, 혼자 뤼네부르크(Lueburg)로 갔습니다. 여기서 바흐는 성미카엘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학교 공부를 마쳤죠. 이런 상황 때문에 바흐는 일찍 철이 들었던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음악가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닦아 나갔습니다. 성미카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게오르크 뵘을 비롯한 유명한 오르가니스트들과도 사귀었고 함부르크를 여행하면서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음악은 물론 프랑스 악파의 양식도 접하게 됩니다. 당시 바흐가 대가들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함부르크로 음악 여행을 다니던 때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녀야 했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참아야만 했다고 하죠. |
바흐는 어린 시절 성가대에서 천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지지만 변성기가 지난 후에는 악기 연주를 해서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바흐는 다양한 악기 연주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고 하는데요, 오르간을 비롯해서 바이올린, 비올라, 스피넷, 클라비코드, 챔발로 등 다양한 악기를 다뤘다고 합니다. 바흐는 1703년 [18세] 드디어 뤼네부르크에서 직업 음악가로 첫 발을 내딛습니다. 바이마르 궁정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잠시 일한 뒤 아륀슈타트(Arnstadt)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나이 겨우 18세였지만 그의 오르간 연주 실력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
또한 바흐는 음악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젊은이였습니다. 젋은 시절 그가 간직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위대한 작곡가 바흐가 탄생되는 밑거름이 됐던 것일텐데요, 아룬슈타트(Arnstadt) 시절 그는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뤼벡(Lubeck)의 북스테후데(Buxtehude)의 음악을 듣기 위해 한 달 동안 휴가를 내 뤼벡을 방문했고 이곳에서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음악에 푹 빠져 휴가 기간을 훌쩍 넘기고 넉 달 만에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아룬슈타트에서는 바흐의 이런 행동 뿐만 아니라 너무도 뛰어났던 오르간 연주 솜씨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교회 예배 시간에 손건반과 발건반을 이용해 북스테우데처럼 화려하게 연주하자 신도들은 예배보다는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주장은 "성스러워야 할 코랄을 이상하게 변주해서 신도들을 혼란스럽게 한 바흐는 징계를 받아야만 한다" 는 것이었고 그 후에도 그는 계속 교회측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
마침내 바흐는 1707년[22세]에 뮐하우젠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죠. 수많은 교회음악을 남긴 바흐가 비로소 교회 칸타타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1707년부터 1년 동안 일했던 뮐하우젠의 성브라질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같은 해에 전부터 교제해 오던 6촌인 마리아 바르바르와 결혼을 했죠. 1708년 23세의 바흐는 다시 직장을 옮겨 바이마르 궁정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오르간 제작에도 조예가 깊었던 바흐의 계획에 따라 이곳 오르간이 개조되었고 그는 이 오르간을 연주하며 주옥같은 오르간 작품들을 써내려 갔습니다. |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바이마르 시절에 거둔 성과 중의 하나는 이탈리아 협주곡 양식을 충분히 익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흐가 모시던 바이마르 영주의 동생은 음악에 대한 관심이 무척 컸다고 하는데요, 그는 네델란드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발디를 비롯한 여러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협주곡 악보들을 수집해 왔습니다. 바흐는 그가 가져온 비발디의 악보를 연구하면서 비발디 음악에 매료되었고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챔발로 협주곡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작업들을 통해 바흐는 이탈리아 양식을 충분히 익힐 수 있었고 비발디가 바이올린 협주곡에 적용했던 스타일을 챔발로와 오르간 곡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흐가 이런 이탈리아 양식을 습득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들은 전보다 더 부드럽고 세련되어 갔던 것입니다. |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1714년 (29세)에 젊은 나이로 바이마르 궁정의 악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4주마다 한 곡의 교회 칸타타를 작곡해야 했죠. 바흐의 명성이 높아지고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초청을 받기 시작한 것도 바로 바이마르 시절이었습니다. |
1717년 8월의 어느 날 [32세] 바흐는 드레스덴 궁정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의 뛰어난 연주자인 루이 마르샹과 챔발로 경연을 벌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흐의 연주 실력을 잘 알고 있던 마르샹이 그날의 경연을 피해 아침 일찍 드레스덴을 떠나는 바람에 바흐는 연주 시합 대신 독주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
바흐는 드레스덴에서의 이런 명성과 기쁨을 뒤로 하고 이미 사표를 제출하고 떠나왔던 바이마르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바흐는 바이마르 영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쾨텐의 일자리를 수용해 가족들을 이미 그곳으로 보낸 상황이었고 이런 그의 행동에 화가 난 영주는 바흐가 바이마르에 돌아오자 그를 한 달여 동안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고집이 매우 셌던 바흐는 이런 상황에서도 쾨텐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바이마르 영주는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죠. 1708년(23세)부터 1717(32세)년까지 바이마르에서 일했던 바흐가 쾨텐으로 옮겨가기까지 이렇게 한 차례 힘든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쾨텐에서는 그의 생애에서 음악가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흐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다름 아닌 쾨텐 시절이었습니다. 쾨텐으로 옮겨가기 전 바하를 붙잡아두려는 바이마르 영주 때문에 그는 한 달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지만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바흐는 마침내 1717년(32세) 말부터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 쾨텐의 영주는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춘 열렬한 음악애호가였지만 종교적으로 칼빈파였기 때문에 루터파 교회와는 달리 예배에서 음악을 멀리 했습니다. 그래서 바흐는 이 시절 교회음악보다는 세속음악, 특히 기악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입니다. 바흐는 쾨텐에서의 생활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을 정도로 행복했고 그런 가운데에서 기악곡들의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
가정에서는 음악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준 아이들에게서도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특히 건반 악기의 조율 방법에 있어 평균율 체계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 "평균률 클라비어곡집"은 바흐가 큰 아들 빌헬름 프리드만을 위해 작곡한 작품으로 바흐는 이 작품의 겉표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클리비오 소곡집, 빌헬름 프리드만 바흐를 위해서. 1720년 1월 20일 쾨텐에서 시작되다." 바흐에게 쾨텐 시기는 비할 데 없이 행복했던 시절이었지만 첫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는 슬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1720년 6월 [35세], 그는 영주인 레오폴트 공의 온천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가 있는 동안 13년간 결혼 생활을 해 온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가 한 달 후 쾨텐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의 장례가 치뤄지고 열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바흐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작품을 쓰는 데 몰두하며 보냈습니다. |
그리고 이듬해 12월 35살의 바흐는 [이듬해라면 36세이다] 15살 연하의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을 했습니다. 바흐는 어린 신부에게 늘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아내를 위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을 만들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는 미뉴엣 같은 소품을 비롯해서 클라비어를 위한 걸작인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일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나 막달레나는 바흐의 훌륭한 내조자로서 남편의 악보 사보의 일을 도왔을 뿐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바흐가 아름다운 소프라노 아리아를 쓸 수 있도록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줬습니다. |
그러나 이들 부부는 쾨텐에서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영주가 결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영주는 점점 음악과 멀어졌고 자연스럽게 궁정 음악가들도 소홀히 대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바흐는 1723년 [38세] 6년간의 쾨텐 생활을 정리하고 라이프찌히로 떠납니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찌히의 성토마스 교회 부속학교의 악장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여러 가지 직무에 시달리며 고달픈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도시 전체의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를 관장했을 뿐 아니라 성토마스 교회 부속학교의 학생들도 지도했습니다. |
의무적으로 매주 교회에서 사용할 칸타타를 작곡해야 했던 바흐는 이즘에 약 300여곡의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그 가운데 200여곡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1724년과 1727년 성 금요일에 초연되었던 "요한 수난곡"과 "마태 수난곡", 그리고 "마그니피카트(Magnificat)"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같은 교회음악의 걸작들은 라이프찌히 시절에 작곡되었죠. 그런가 하면 1729년에는 텔레만이 창립한 대학생 연주단체인 콜로기움 뮤지쿰의 지도를 맡게 되었는데 커피 칸타타를 비롯해 7곡의 쳄발로 협주곡, 그리고 4곡의 관현악 모음곡도 콜로기움 뮤지쿰의 연주회에서 연주되었던 작품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흐는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춘 자식들과 집에서 함께 쳄발로 협주곡을 연주했다고 하는데요,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 바흐가 아들인 빌헬름 프리드만, 그리고 칼 필립 엠마뉴엘과 함께 석 대의 챔발로 협주곡을 연주하던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
바흐는 라이프찌히에서 일하는 동안 대학 당국과 교회 부속학교 교장인 에르네스티, 그리고 시 참사회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시 참사회는 바흐의 외유가 너무 잦다고 비난했죠. 일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했던 바흐는 바이마르, 카셀, 드레스덴 등 고작해야 독일 내에서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카셀에서는 성마르틴 성당의 오르간을 시연했고 드레스덴에서는 헤르만 폰 카이저링크 백작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성소피아 교회의 질베르만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훗날 바흐는 드레스덴의 카이저링크 백작의 요청으로 그 유명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작곡하기도 했죠. |
17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바흐는 공적인 일을 빨리 끝낸 뒤 자신의 개인적인 작업을 하는 데 좀 더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 바흐는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쁨" 같은 작품들을 쓰고 예전의 작품들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바흐는 만년에 접어들면서 뇌일혈 발작을 일으켜 좋지 않던 시력이 더 나빠졌고 눈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끝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1750년 7월 28일 [65세] 재발한 뇌일혈이 원인이 되어 라이프찌히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바흐의 두 번째 아내였던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 바흐가 시간을 무의미하게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바흐가 자주 했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요,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쓴 시간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요즘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모습으로 살아갔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바흐는 항상 교회와 영주가 요구하는 음악을 만들어내기에 바빴고 그런 가운데에서 그의 걸작들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바흐는 두 아내 사이에서 스무 명의 자식을 낳아 그 중 11명을 일찍 여의고 9명을 키웠습니다. 바흐의 2세들 가운데 빌헬름 프리드만, 칼 필립 엠마뉴엘,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요한 크리스티안 등이 직업 음악가로 활동했죠. |
바흐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도 모차르트를 비롯해 하이든, 베토벤, 쇼팽, 멘델스존, 브람스, 바그너, 그리고 20세기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특히 이탈리아의 작곡가 부조니는 1888년부터 1920년까지 바흐의 많은 작품을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하거나 개작했습니다.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로베르트 슈만은 바흐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가 음의 구성에 대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근면함 때문만은 아니며 타고난 명석함과 예민한 천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세의 우리들이 아무리 멋진 음의 직조물을 발견했다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바흐의 음악 안에서 실을 뽑아낸 것이며 게다가 어떤 것은 이미 짜여져 있는 것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바흐를 상대로 해서는 결코 완전한 것이 없으며 바흐의 음악은 들을수록 깊이를 더해간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