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인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파가니니는 오직 한 번만 온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파가니니 같은 위대한 비루투오조를 결코 모방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겠죠. 사전에는 '비로투오조'라는 말이 "덕이 있다 라는 뜻으로 예술이나 도덕에 대해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 또는 예술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지칭한다" 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술, 특히 음악에서만 이 말이 사용되죠. 놀라운 테크닉과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보여준 비루투오조의 전형 파가니니는 당시 전 유럽에 파가니니 현상을 일으키며 많은 이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베를린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멘델스존은 친구 모셜레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는 그의 연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네. 나에게 그 연주가 어떠했는지 상세히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부탁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걸 모두 쓰자면 편지 내용 모두를 할애해야 할 정도니까. 그는 너무도 독창적이고 특이해서 그의 스타일에 대한 인상을 전하려면 우선 철저한 사전 분석이 요구될 걸세." 기이할 정도로 독특하고 뛰어난 연주로 일반 청중은 물론 당대 음악가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선원이기도 한 부두 노동자였습니다.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힘든 형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파가니니가 4살 무렵 홍역이 이탈리아를 휩쓸었을 때 여동생은 사망하고 그는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린 파가니니는 온종일 아버지가 취미로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고 합니다. 파가니니는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제노바의 여러 선생님들께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는데 항상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선생님을 능가하곤 했습니다.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학비 마련을 위해 1795년 13살의 파가니니를 무대에 세웠는데 파가니니는 이 연주회에서 젊은 귀족의 호감을 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여행 경비로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더 많은 가르침을 받게 하려고 아들을 파르마의 롤라에게로 데려갔습니다. 롤라는 이때 마침 몸이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파가니니가 막 작곡을 끝낸 롤라의 악보를 보고는 거침없이 연주를 해냈죠. 이것을 들은 롤라는 파가니니의 재능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파가니니는 롤라의 소개로 파르마의 유명한 음악 교사들에게서 작곡법과 화성악, 대위법을 배우게 됩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19살 때까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연주활동을 했는데 그는 이미 그 시절 청중을 압도하는 현란한 연주를 펼쳤습니다. 19살이던 1801년 파가니니는 루카로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이듬해인 1802년부터 1805년까지 3년 동안은 파가니니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여러가지 불확실한 이야기들만 전해져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져 호젓한 성에 칩거하면서 그녀를 향한 사랑의 기쁨과 환희를 선율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또 파가니니가 사랑했던 여인은 피사 근처에 성을 소유했던 열정적인 기타 연주자였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가니니가 바이올린과 기타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이 이야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그가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해 쓴 사랑스런 작품들 대다수가 바로 이 무렵에 작곡되었습니다. ------------------------------------ 또 다른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도박으로 진 빚 때문에 감옥살이를 했고 그 감옥에서 홀로 바이올린 테크닉을 연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또 다른 설은 당시 전염병이 돌자 여러 도시들이 모두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파가니니는 고향인 제노바에서 가족들과 지내다가 1805년이 되어서야 그 전에 활동하던 루카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이죠.

하여튼 파가니니는 1805년에는 루카의 궁정음악가로 임명되어서 1810년까지 활동했습니다. 루카의 여왕 엘리자 바치오키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좋아했고 파가니니와는 한때 연인 사이였다고 전해집니다. * 엘리자 바치오키(Elisa Baciocchi)는 여왕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여동생으로서 이탈리아 북부 여러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된 상태.

1810년 28세의 파가니니는 루카 궁정을 떠나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그 후 20여 년 가까이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연주활동을 하죠.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알프스 북쪽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다른 나라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때때로 그는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 도박에 빠져서 몹시 아끼던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잃을 뻔 하는가 하면 - 미성년 소녀와의 스캔들로 소송까지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 게다가 건강도 몹시 나빠져서 1822년과 1823년에는 모든 연주활동을 포기해야 했죠.

1824년(42세) 연주활동을 다시 시작한 파가니니가 오랜 기간 이탈리아에서만 순회연주를 하다가 비로소 다른 유럽국가로의 연주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1828년(46세)이었습니다. 첫 외국 연주는 오스트리아 빈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황제로부터 '궁정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파가니니는 그 후 작센, 프로이센, 바이에른 지방과 보헤미아, 폴란드를 연주여행 했고 1831년 (49세)에는 파리와 런던 무대에도 데뷔했습니다. 파가니니는 이 유럽 순회 연주를 통해 일종의 파가니니 신드롬을 일으켰죠.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 작곡가, 화가, 작가 등 모든 분야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가운데에는 멘델스존, 쇼팽, 슈만, 리스트, 고티에, 괴테, 하이네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가니니는 1834년에 (52세)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공연 했지만 이전처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1836년과 1837년에는 (53세, 54세) 프랑스 남부에서 콘서트를 가지기도 하고 파리에서 도박장을 여는 데 돈을 투자했다가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의 건강은 점점 안 좋아져 회복 불가능한 상태까지 악화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이랬습니다. "극도의 신경과민, 요추 척수 질환, 매독 바이러스가 연구계와 경구계까지 침투한 것으로 보임." * 입천정 딱딱한 부분 : 경구계 * 그 뒷쪽의 말랑한 부분 : 연구계, 파가니니는 의사로부터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진단을 받고 56세이던 1838년 파리를 떠났습니다. 1840년 (59세) 그는 남프랑스 니스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엄청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보내다 5월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가니니는 살아있는 내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에 시달린데다 고해성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시 교회로부터 성스러운 땅에 묻힐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의 시신은 5년 동안이나 지하실과 동굴의 섬에 보관되었다고 하죠. 우여곡절 끝에 1845년 이탈리아의 파르마로 간 뒤에도 8년 동안은 교구 교회의 오래된 제의실에 머물렀고 죽은 지 13년이 지난 185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아들 아킬레의 기부로 조성된 파르마의 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파가니니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창조해 나갔던 연주자였습니다. 이런 독특한 연주 스타일 때문에 그는 아마도 당시 음악 역사상 가장 이야기거리가 많은 연주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당시 언론에서는 파가니니를 독창적인 능력을 가진 천재 연주자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연주력을 보여주는 악마적인 연주자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들 때문에 파가니니의 이미지가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 결과 파가니니는 근대적 비루투오조의 표상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죠. 그래서 파가니니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비루투오조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파가니니는 이전의 선배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테크닉 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광기어린 연주로 청중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가는 능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청중을 휘어잡는 비루투오조의 능력은 파가니니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이후의 모든 비루투오조들이 무대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고 리스트가 피아노의 비루투오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파가니니의 연주에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 실력은 뛰어났고 19세기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기괴한 외모와 신들린 연주 기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의 연주회는 슈만이나 리스트, 슈베르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대중 신문〈리토그래프〉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파가니니가 무려 5천 명의 청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두 시간 공연을 하고 2천 프랑을 가져갔다" 2천 프랑은 현재 우리 돈으로 1억 원에 상당하는 큰돈이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연주회는 항상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파가니니가 엄청난 돈을 벌자, 투기꾼들이 사건을 일으킨다. 1836년(53세) 때의 일이다. 그들의 계획은 간단하다. "파리 몽블랑 거리에 파가니니를 이용한 카지노를 열어서 그의 유명세를 이용해 큰돈을 벌자" 그래서 카지노(도박장)의 이름을 "카지노 파가니니"로 지었고, 그에게 투자하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음악을 강조하며 환심을 샀다. "카지노 내에 공연장을 만들고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해 공연하겠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공연장이 아닌 도박장이었다. ---------------------------------- 1837 년 10월 (11월?) 마침내 문제의 카지노가 개장했다. 겉으로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문학예술클럽. 건물 1층에는 연주 홀을 두어 대중에게 공개했는데 50명의 전속 브라스밴드가 연주를 맡았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가 도박장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투기꾼들은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통해서라도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런데 당시 파가니니는 건강 악화로 연주 불가능 상태. ------------------------------- 결국 1839년 카지노 운영진들은 파가니니가 계약을 위반했다며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1839년 6월 28일, 파리 1심 법원은 파가니니에게 "2만 프랑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양쪽 모두 항소하여 사건은 파리 2심 법원으로 넘어갔다. 지루한 소송에 지친 파가니니는 남프랑스 마르세유로 요양을 떠났다. 평생에 걸친 떠돌이 생활로 심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1839년 10월에 고향 제노바로 옮겨갔지만 신경 이상 증상이 악화되어 곧바로 프랑스 휴양지 니스로 옮겼다. ------------------------------ 이듬해 1840년 1월 3일 파리에서 열린 2심 최종 재판에는 파가니니 대신 변호사만 참석했다. 이때 변호사의 변론과 원고 측 반론이 법정 기록으로 남아 있다. 파가니니 측 변호사 : "카지노의 투기꾼 경영자들은 설립 자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이름을 이용하고자 연주장 설립을 미끼로 파가니니를 꼬드겼고 투자까지 하게 만들었다. 파가니니는 실제로 병이 악화되어 카지노뿐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서도 연주를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와병으로 인한 불가피한 계약 불이행이므로 카지노 경영자들은 파가니니에게 그 무엇도 요구할 법적 권리가 없다" ------------------------------- 원고 측 주장: "아무리 봐도 파가니니의 잘못이 크다. 파가니니는 신출한 재능으로 청중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카지노 안에 자신만의 연주홀을 만들어주면 연주를 하겠다고 공언하기에 계약을 체결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꼭 연주를 하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 적도 있다. 그땐 이미 20프랑짜리 티켓이 날개 돋친 듯 팔려 전석이 매진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파가니니가 연주를 못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파가니니의 연주 대신 오페라 공연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파리 경찰은 ‘카지노 파가니니’가 오페라 공연장으로 허가받은 건물이 아니라며 오페라 공연을 불허했다. 이로 인해 엄청난 손해를 입은 우리에게 2만 프랑은 손해배상액으로 너무 적다" ------------------------------ 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파가니니는 5만 프랑을 지급하라.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10년의 징역에 처한다" 실제 부대비용까지 합하면 파가니니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5만 2천 프랑에 달했다. ------------------------------- 파가니니는 그 판결 4개월 후 1840년 5월 27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