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화려하게 빛냈던 작곡가일 뿐 아니라 전설처럼 여겨지는 피아노 연주의 명인입니다. 또한 그는 음악 교사, 지휘자로도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리스트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대 음악계를 풍미하며 믿기지 않는 숱한 에피소드를 남긴 뛰어난 피아노 비르투오조로서의 모습입니다. 음악 사전에 보면 비르투오조란 "유덕한, 즉 덕이 있는"이란 뜻을 가진 말로 예술이나 도덕에 대해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 또는 예술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로 음악에서만 비르투오조라는 말이 사용되는데요. 그 시작은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31년[20세] 3월 9일 파가니니의 파리 연주회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날 연주회에 참석했던 청중 가운데에는 파가니니의 공연에 압도당해 자신의 미래를 바꾸기로 결심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20살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였죠. 리스트는 이미 10대 초반에 빈과 파리, 런던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해 당대 최고의 피아노 비르투오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파가니니 예술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리스트는 진정한 피아노의 비르투오조가 된 것이죠. |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라이딩이라는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하이든이 오랫동안 봉직했던 헝가리의 명문가 에스테러하지가에서 영지 관리인으로 일했는데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서 첼로를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은 에스테르하지가의 악장이었던 하이든과도 친분이 있었고 훔멜이나 케르비니 같은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처음 피아노늘 가르쳤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리스트는 9살 때 이미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전[궁정]에서 열린 헝가리 귀족들의 모임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질 정도였습니다. 이 때 어린 리스트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한 후작은 다른 귀족들과 함께 6년간 장학금을 주어 리스트가 피아노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 덕분에 리스트는 어린 나이에 조국 헝가리 땅을 떠나 빈으로 가게 되죠. |
빈에서 리스트는 베토벤 슈베르트를 만날 수 있었고 또 샬리에르에게서 작곡을 배우는 한편 베토벤의 제자이자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칼 체르니에게서는 피아노늘 배우게 됩니다. 체르니에게 갔을 때 리스트는 물론 놀라운 재능을 보였지만 기초가 제대로 닦여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체르니는 리스트를 이렇게 가르쳤다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열광적이고 재능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을 가르쳐 본 적이 없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 신체적인 능력보다 앞선 천재들은 테크닉을 갈고 닦는 데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무엇보다 초기에 능숙한 기교를 발휘하도록 완벽하게 다듬고 익혀서 나중에 나쁜 버릇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리스트가 곡을 매우 빨리 습득하도록 가르쳤고 이런 훈련 덕에 리스트는 처음 보는 곡이 꽤 어려운 곡일지라도 마치 그 곡들을 오랫동안 공부한 것처럼 완벽하게 연주해 낼 수 있는 탁월한 초견 연주가가 될 수 있었다. 또 나는 그에게 자주 주제들을 제시하고 즉흥 연주를 시킴으로써 그가 즉흥 연주의 재능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했다." |
체르니에게 배운 뒤 리스트는 1823년[12세] 파리로 건너 가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2살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미 세련된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였고 이 때부터 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작곡 공부도 계속해 나가는 한편 음악 외적인 교양을 쌓아 나갔고 자연스럽게 파리 사교계 뿐만 아니라 영국과 스위스 등지까지 소개되어 그곳들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
어린 시절, 리스트를 데리고 이곳 저곳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던 아담은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16세 때] 아들 리스트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들아, 너의 음악에 충실해라. 그리고 너를 생각하면 나는 여자들 때문에 몹시 걱정이 된다. 앞으로 그들이 너의 골칫거리가 되어 결국에는 네 인생을 지배될까 봐서야." 리스트의 아버지가 남긴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리스트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어버린 채 고위 관리의 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벽에 부딪쳤고 리스트가 사랑했던 여인은 귀족과 약혼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리스트는 큰 절망에 빠졌고 성직자가 되려고도 했습니다. 이런 사랑의 열병을 치르고 난 뒤 리스트는 여섯 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연애 사건을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스트가 22살 때의 일이었죠. 마침내 2년 뒤인 1835년[24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이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리스트와 함께 스위스로 떠나버립니다. 두 사람은 교양과 세련됨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파리 생활에 그동안 염증을 느껴왔고 스위스로의 도피 행각은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동시에 인습적인 도덕에 대한 낭만적인 항거이자 도전이기도 했죠. 이 시기 리스트는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순례의 해, 파가니니 대연습곡 등을 썼습니다. 높은 지성과 폭넓은 교양을 지니고 있었던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은 예술적으로 리스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스위스 제네바에 살면서 세 아이를 나았지만 4년 여 뒤에 [28세] 헤어지고 맙니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리스트의 어머니가 맡아 키웠고 리스트는 자식들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세 자식 가운데 둘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하나 남은 딸 코지마는 훗날 아버지의 제자인 한스 본 빌로와 결혼했다가 얼마 뒤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던 바그너와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요. |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관계가 끝나갈 무렵 피아니스트로서의 리스트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스무 살에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동과 충격을 받은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어 믿을 수 없는 기교로 유럽 전역을 돌며 많은 이들을 놀라움에 빠뜨렸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나중에 작곡가 슈만의 부인이 된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커도 있었습니다. 그는 1838년 [리스트 나이 27세] 빈에서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피아니스트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공포와 경이로움으로 사람들을 흥분에 빠뜨린다. 그의 정열은 한계를 모른다. 그는 때때로 선율을 산산조각 내 버리거나 페달을 지나치게 사용해서 미적인 면을 손상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이 문외한들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는 혈기 넘치는 음악가다. 그의 예술은 그의 삶을 나타낸다." 리스트의 연주는 일반 음악 애호가는 물론이고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에게 더욱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슈만은 말하기를 "파가니니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청중들을 압도하고 흥분하게 만드는 괴력을 가진 음악가를 본 적이 없다"라고 했고 슈만의 부인이자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도 1840년 [리스트 29세] 빈에서 있었던 리스트의 연주회를 본 뒤 남편 슈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리스트를 알게 된 후로는 모든 비르투오조들이 아주 하찮아 보입니다. 테베르크조차도요. 그리고 저 자신도요. 저 자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군요." 1839년[28세]에는 파리에 돌아온 또 한 사람의 피아노 비르투오조, 텔베르크로부터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리스트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8년 동안 그는 최고의 피아노 비르투오조라는 명성을 확고하게 굳혀 갔습니다. |
리스트는 연주 여행으로 바쁘지 않을 때에는 주로 파리에 머물렀는데 이 때에도 그는 화려한 여성 편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애인들 가운데에는 알렉산드로 뒤마의 연인이자 그의 소설 동백꽃 아가씨의 모델이 되었던 마리 뒤플레시, 바바리아 군주를 비롯한 여러 남자와 스캔들을 일으키던 댄서 롤라 몬테스터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피아노 제작자로 유명한 플레이엘 집안의 여인인 마리 플레이엘과도 염문을 뿌렸는데 쇼팽이 집에 없는 사이 리스트가 쇼팽의 집에 플레이엘 부인을 불러 들였던 일은 쇼팽과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과의 이런 염문설 속에서도 비르투오조로서의 리스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위대한 피아노 비르투오조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는 당대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고 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실신하는 청중들도 있었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그의 손수건이나 꽃, 담배갑 같은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기까지 했다는데요, 리스트는 지금의 인기 스타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
프란츠 리스트라는 음악가는 여러 면에서 볼 때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설명하거나 간단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리스트는 너그럽고 친절했는가 하면 쉽게 화를 내거나 심하게 변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리스트는 평생동안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항상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부유한 집안의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다른 한편에는 고독함과 수도사의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속적인 쾌락을 따르면서도 늘 마음 속으로는 성스럽고 종교적인 것을 열망했고 자신의 아이는 돌보지 않으면서도 동료 음악가들과 제자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넓은 아량을 보였습니다. 리스트는 이렇게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전설적인 낭만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음악계에서 가장 기품있고 가장 욕심이 적은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누구겠는가?" 라는 질문에 답은 "프란츠 리스트" 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프란츠 리스트는 위대한 피아노의 비르투오조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매우 기교적인 피아노 작품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이전의 피아노 테크닉으로는 연주하기 힘든 피아노곡들을 많이 썼습니다. 20세기 음악가 쇤베르크가 말하기를 "리스트의 음악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기교적으로 뛰어난 피아노 곡들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리스트의 음악이 단순히 기교적인 차원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이전의 피아노 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음악적 질감과 음색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피아노 음악은 오케스트라적이었습니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그의 피아노 음악은 백 명의 연주가가 하모니를 이루어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 곡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죠. 이런 재능은 특히 그가 수많은 관현악곡을 피아노곡을 편곡하는 데서 크게 발휘되어 어떤 비평가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원곡인 관현악으로 듣는 것보다 리스트가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연주를 들을 때 훨씬 더 감동적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
리스트는 선배나 동료, 후배 음악가들의 작품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것으로도 매우 유명한데 이는 대부분 다른 음악가의 작품에서 감명이나 자극을 받아서이거나 자신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더욱 과시하기 위해 레파토리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모두 그런 목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워낙 동료와 후배를 아끼고 남 도와 주기를 좋아하는 그의 성품에서 나온 일이기도 합니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재능 있는 다른 음악가들을 널리 소개하기 위해서 그들의 작품을 편곡해 자신의 훌륭한 피아노 솜씨로 연주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음악적 존경심을 표시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런 리스트의 다양한 피아노 편곡은 교향곡이나 오페라 무대를 쉽게 접할 수 없는 그 당시의 일반 관객들에게 피아노 편곡을 통해서나마 그런 작품들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
리스트는 특히 후반의 생애 동안에 작곡가로서 음악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리스트가 생애 후반기에 작곡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리스트는 피아노 비르투오조로 활약하던 시기에 매우 광범위한 지역을 다니며 순회 연주를 했습니다. 북으로는 러이사의 상트페트로부르크, 동쪽으로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서쪽으로는 포르투칼의 리스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중 리스트는 러시아에서 자신의 후반의 생애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러시아 연주 여행을 했던 것은 1846년[35세]부터 이듬해에 걸쳐서였는데 1847년[36세] 2월, 키에프에서 자선 공연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100루블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한 귀부인을 만났는데 그녀가 바로 카롤리네 폰 자인 비트켄슈타인 공작 부인이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이 부인은 러시아의 공작과 결혼했지만 별거 중이었고 혼자서 딸 하나를 키우면서 문학과 철학, 종교, 음악 등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결국에 리스트와 카롤리에는 함께 살게 됩니다. 카롤리에 폰 자인 비트켄슈타인 공작 부인은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지성적이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건실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
리스트는 카롤리네를 만나기 몇 년 전부터 바이마르에서 궁정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피아노 연주를 하며 이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음악가의 위치에 있었는데 공작 부인을 만난 이듬해인 1848년[37세]부터는 이곳 궁정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바이마르에 정착하게 된 리스트는 1년 후 사랑하는 여인 카롤리네를 불러 함께 살게 되죠. 이렇게 해서 리스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음악적 결실을 거둔 바이마르 시대가 시작됩니다. 바이마르를 방문한 베를리오즈가 카롤리네를 두고 "리스트의 훌륭한 반려자"라고 칭찬했을만큼 그녀는 리스트의 창작활동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리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의 생활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확실히 화려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생명이란 의외로 짧은 법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젊었을 때 한시 바삐 작곡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피아노 연주는 사라져 버리지만 훌륭한 작품은 세상의 보석으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이니까요. 리스트는 카롤리네의 의견에 따라서 이즈음부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하는 연주활동이나 피아노 교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리스트는 화려한 피아노 비르투오조 활동을 접고 작곡 활동에 몰두한 결과 바이마르 시절 많은 걸작들을 만들어 냅니다. 피아노 소나타 B단조, 헝가리안 랩소디, 초절기교 연습곡, 피아노 협주곡 1번 그리고 많은 다른 작곡가 곡에 피아노 편곡 작품을 비롯해 교향시 전주곡, 파우스트 교향곡, 단테 교향곡 등이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작곡가로서 리스트가 남긴 작품들은 크게 두 장르의 음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피아노 작품과 교향시인데요 그는 피아노 곡 이외에 교향시 분야에서도 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음악 형식은 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리스트는 비로소 여기에 교향시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를 표제음악의 대표적 형식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작곡가입니다. 리스트가 바이마르 궁정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비롯해 베를리오즈와 슈만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새로운 음악들을 지휘하면서 낭만주의 음악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바이마르를 유럽 음악 활동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죠. 그가 바그너와 베를리오즈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스트 자신에게도 음악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
하지만 리스트는 1859년 48세의 나이에 바이마르를 떠나게 됩니다. 리스트에 대한 바이마르 궁정과 대중들의 열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들해졌고 리스트는 여기에 환멸을 느꼈던 것이죠. 그런가 하면 리스트는 바이마르 시절 자신의 창작열에 불을 지펴준 카롤리네 폰 자인 비프켄슈타인 공작 부인과 결혼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는 사실상 부부처럼 지내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동거에 그쳤던 것과는 달리 그는 카롤리네와는 정식 결혼으로 맺어지길 강하게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죠. 결혼을 위해서는 공작 부인인 카롤리네가 법적 남편인 공작과 이혼을 해야만 했는데요 당시 러시아의 귀족 사회에서는 이혼 수속이 매우 까다로웠고 게다가 공작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고 이 문제에 러시아 황제를 비롯한 그의 측근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사태는 매우 복잡해졌고 이를 해결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마침내 1860년[49세] 겨우 러시아 쪽의 문제가 해결되어 로마 교황청의 허가를 얻는 일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청의 허가까지 내려져 이들은 1861년[50세] 10월 22일 리스트의 생일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습니다. 결혼 이틀 전 로마에 도착한 이들은 조용히 결혼 전야를 보냈는데요 예정되었던 결혼식 바로 전날 교황청에서 급히 결혼 허가 결정이 번복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해 왔습니다. 자인 비트켄슈타인 공작 측에서 교황청의 결혼 허가 결정에 강력히 반발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죠. 14년 동안 공식적인 결혼을 기다려 온 두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고 맙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체념하고 만 카롤리네는 로마에서 종교 생활에 들어갔고 리스트도 (몇 년 후) 카톨릭에 입문해 하급 성직자의 서품을 받았습니다. |
리스트가 성직자가 된 것은 1865년, 54살 때였습니다. 리스트는 성직의 7품계 가운데에서 4가지 품계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미사를 집전할 수도, 고해 성사를 줄 수도 없는 신부로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성직을 떠날 수도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신분으로 한편으로는 명예 수사 신부이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처음에는 로마에 머물렀지만 추기경의 배려로 에스테 별장에 몇달씩 기거하면서 작곡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69년[58세]부터는 로마의 수도원과 바이마르, 그리고 고곡의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생활을 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수도자로서 종교적 성찰과 명상을 했고 바이마르와 부다페스트에서는 작곡과 지휘활동을 했는데 당시 리스트는 자신을 가리켜 "반은 수도사, 반은 집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특히 바이마르에 머물 때에는 오늘날의 마스터 클래스와 유사한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이 때 그를 거쳐간 제자들 가운데에는 한스 본 빌로, 칼 타우치히,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또한 리스트는 돈을 받고 하는 연주 활동을 그만 둔 뒤로는 주로 자선 연주회에서 연주를 했는데요 노년에도 그의 연주 솜씨는 녹쓸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 연주자들의 기량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리스트는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의 연주도 매우 훌륭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속세와 성스러움을 넘나들면서 만년을 보내던 리스트는 1886년[75세] 7월 딸 코지마가 연출한 바그너의 작품을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로 갔습니다. 친구이자 사위인 바그너는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리스트는 파르지팔과 프레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한 뒤 딸 코지마가 사는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75살] --------------------------- * 리스트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11년에 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는데 `리스트와 여인들`이라는 것까지 있다. 이 책에는 26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