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오페라계의 거장이 될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는 주제페 베르디 (이탈리아), 그리고 한 아이는 리하르트 바그너(독일). 이 둘은 태어난 해도 같지만 우연히도 1842년 같은 해에 각각 나부코와 리엔치라는 오페라 작품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얻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다른 개성을 가진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되죠. 베르디는 평소 바그너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베르디가 아이다, 돈 카를로, 오델로 같은 작품에서 바그너 스타일을 모방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어느 정도의 영향은 받았다고 하더라도 베르디의 오페라는 결코 바그너의 스타일과 비슷해질 수 없었습니다. 바그너가 음악적 모험을 좋아해서 새로운 음악의 길을 개척해 나갈 때에도 베르디는 결코 전통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한 작곡가는 아니었으니까요. |
베르디는 1813년, 이탈리아 파르마 지역의 론콜레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원과 습지가 많은 이곳에는 가난한 소작농들이 많았는데 베르디의 부모님은 이곳에서 여관과 식료품 가게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고 또 특별히 음악가로 성장할 만한 환경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베르디는 론콜레 마을의 교회 오르간 주자에게서 음악을 배웠고 선생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베르디는 불과 9살의 나이로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10살이 되자 그는 부유한 상인인 안토니오 바레치의 도움으로 가까운 도시 부세토(Busseto)에 있는 바레치의 집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베르디는 부세토에서 대성당 오르간 주자이면서 음악학교 교장인 페르디난도 프베르지에게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으면서 음악가를 향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몇년 뒤 베르디는 아직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제토 시에서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었는데 베르디 자신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이미 다양한 종류의 많은 작품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지만 훗날 오페라 작곡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
베르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바레치의 집에서 사는 동안 바레치의 딸인 마르게리타와 사랑에 빠집니다. 바레치 부부는 재능있고 전도 유망한 베르디와 딸의 교제를 막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자 더 이상 베르디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레치 뿐만 아니라 부세토 시에서는 늦기 전에 베르디를 밀라노 음악원에 보내 공부를 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832년(19세) 베르디는 부제토 시 장학금과 미래의 장인 바레치의 후원금도 받아서 밀라노로 떠납니다. 베르디는 밀라노 음악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큰 기대에 부풀어 밀라노에 도착했지만 입학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정원이 꽉 차 있는 음악원에 베르디는 나이가 너무 많은 지원자였던 데다가 작곡 실력은 나무랄 데 없지만 피아노 연주 실력이 부족했다는 것이 낙방의 이유였습니다. 아뭏든 베르디는 이에 실망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지만 자신에 대한 바레치의 신뢰와 마르게리타의 사랑을 생각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음악원 대신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빈센초 라비냐에게서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 가서 도니제티, 메르카단테와 같은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
3년 동안 밀라노에서 공부를 마치고 1835년 (23세) 부세토로 돌아간 베르디는 마을 음악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사랑하는 마르게리타 바레치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들은 부세토에서 행복한 생활을 했지만 오페라 작곡에 뜻을 둔 베르디는 2년 뒤 다시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갔습니다. 이 시기에 베르디는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연이어 겪게 됩니다. 이미 고향을 떠나기 전 두 살도 안 된 딸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었는데 밀라노에 온 이듬해에 아들마저 잃게 된 것이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1838년 (25세)부터 1840년(27세) 사이 두 아이와 아내를 모두 잃게 되자 베르디는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불행한 시기에 쓴 오페라 '하룻만의 임금님' 또한 초연에서 실패해 베르디는 그야말로 이 때 최악의 시기를 보냈던 것입니다. |
베르디가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괴로움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베르디의 손에 들어온 대본은 라 스칼라 소속의 시인 솔레라의 신작 '나부코'였습니다. 라 스칼라의 흥행사 메릴리의 강한 권유로 작곡하게 된 나부코는 1842년 (29세)대성공을 거뒀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이탈리아의 관객들은 앗시리아인에게 핍박받는 유대인의 이야기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읽었던 것입니다. 특히 오페라에 들어있는 자유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가거라 생각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는 말 그대로 대히트곡이 되었습니다. 베르디는 나부코의 성공에 힘입어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라 스칼라 무대에 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롬바르디아인'의 입장권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이었죠. 연이어 작곡한 '에르나니' 또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어 베르디는 이제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전역의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고 공연 교섭을 해왔고 출판사들도 베르디와 계약을 맺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제안하며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베르디는 계속된 오페라의 성공으로 스타 작곡가가 된 것입니다. |
오페라 작곡가로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된 베르디는 관객과 흥행주들의 요구에 맞춰 많은 작품을 써내야 했습니다. 성공이라는 기쁨을 맛보는 동시에 스타 작곡가로서 쉼없이 곡을 쓰는 고된 시간을 보내야 했죠. 베르디 자신이 이때를 노역의 시기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몇편의 실패작이 있긴 했지만 그는 1842년 나부코 이후 7년 동안 성공가도를 달리며 1849년까지 바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베르디는 이렇게 창작에 힘을 쏟는 한편 나부코의 초연 당시 프리 마돈나였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1847년(35세) 경 이 둘은 각각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가 우연히 만나서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이듬해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59년에 정식으로 결혼했죠.) 두 사람의 동거는 당시 큰 스캔들이었지만 그 후 이들은 서로에게 좋은 반려자가 되어 스트레포니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 년을 해로했습니다. 이 시기인 30대 중반부터 마흔에 이르는 동안에 작곡된 작품들이 아틸라, 루이사 밀러, 리골레토, 일토레바토레, 라트라비아타, 베르디 중기의 대표작들입니다. |
젊은 시절 베르디는 대중과 극장측의 요구에 따라 시간에 쫓기며 다작을 했지만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보다 신중하게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성숙해지면서 개성이 확고해졌습니다. 베르디는 프리 마돈나 위주의 작품에서 탈피해서 사실적인 표현과 설득력이 강한 바리톤에 큰 비중을 두어서 보다 극적인 구성을 갖춘 오페라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리골레토, 돈 카를로, 가면 무도회 같은 작품이 바로 이런 작품들이죠. |
베르디는 이렇게 음악사에 남을 걸작들을 쓰는 한편 정치 활동도 했습니다. 1859년부터 통일 운동이 전 이탈리아에 뜨겁게 번지기 시작하자 그는 이탈리아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서 초대 수상으로 베르디가 존경하던 정치가 카보우르가 취임하자 카보우르는 베르디를 초대 의원 선거에 출마하도록 권유했고 베르디는 초대 의원에 당선되어서 의정 활동을 펼칩니다. 하지만 카보우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는 정치 활동을 계속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고 의원직을 그만 두고 나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베르디가 사랑했던 것은 통일된 조국 이탈리아였을 뿐 결코 정치나 권력은 아니었습니다. |
많은 오페라 작곡가들이 그랬듯이 베르디 역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뿐 아니라 유럽 전역을 옮겨 다니며 활동했습니다. 그런 베르디에게 항상 그리운 곳은 바로 고향 마을이었습니다. 그는 작곡가로 성공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곧 고향마을 론콜레와 가까운 보세토 근처 산타가타에 저택을 짓고 넓은 농지도 구입했습니다. 베르디는 이 집 말고도 제노아에 화려한 아파트도 있었고 때에 따라 밀라노의 호텔을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의 마음이 끌리던 곳은 산타가타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작곡도 했고 또 직접 농사도 지었다고 합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베르디는 작품을 쓰는데 더더욱 신중을 기했고 그러다 보니 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베르디의 후기 작품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새로운 오페라에 자극받아 관현악법을 비롯해 연극과 음악의 결합에도 더욱 신경을 쓰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의 후기작은 아이다, 오델로, 팔스타프 인데 특히 '아이다'의 성공 이후 15년 정도의 공백 이후에 발표된 '오델로'에서 베르디는 지금까지의 오페라 작곡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기초로 한 '팔스타프'는 베르디가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완성한 걸작 희곡으로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되었습니다. |
1897년 (84세) 50년 가까운 긴 세월을 함께 해 온 아내 주세피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년의 베르디는 슬픔에 빠졌고 이후에는 고독 속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좋은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관심조차 귀찮아진 그는 밀라노의 한 호텔과 라스칼라 극장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돈 없고 늙은 음악가들을 위한 양로시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01년 1월 21일 88세의 베르디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1월 27일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베르디의 장례는 그의 소망대로 아주 검소하게 치러졌고 약 한 달 뒤인 2월 27일 베르디와 먼저 세상을 떠난 주세피나의 유해는 베르디가 세운 양로원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
- 오베르토 1838년(25세), 첫 오페라 [오베르토]를 완성했다. 그런데 상연 교섭 중에 맏딸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다행히 이듬해에 [오베르토]를 초연하였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 하룻만의 임금 그리하여 후속 작품으로는 희극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 작곡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작품을 만드는 중에 장남과 아내가 잇따라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렇게 가장 비극적일 때 희극 오페라를 써야 했으니 결국 그렇게 완성한 [하루만의 임금님] 공연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대본조차 엉성했으니 성공할 리 없었다. 그는 너무 젊은 나이에 실패를 겪자 실의에 빠져 오페라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 나부코 하지만 주변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다시 새 오페라 [나부코] 작곡에 착수하여 1842년(29세)에 완성, 초연했다. 이 오페라의 내용은 바빌로니아왕의 폭정과 몰락을 다룬 작품으로서 합창의 매력과 애국적인 내용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두며 베르디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통일 운동이 전개되어 애국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나부코]의 연이은 성공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의 조국통일 운동 속에서 제2의 국가(國歌)가 되어 널리 불려졌다. - 맥베드 5년 후의 1847년(34세)에는 셰익스피어 원작에 의한 [맥베드]를 상연했는데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리골레토 1851년 (38세)에 초연된 [리골레토]는 프랑스 국왕의 일탈 행위를 다룬 내용인데 오스트리아 당국의 검열에 걸려 개정해야 했다. 하지만 공작이 노래하는 <여자의 마음>은 순식간에 세상에 퍼지면서 크게 성공을 이루었다. - 일 트로바토레 뒤 이은 작품인 [일 트로바토레](음유시인)은 1852년 12월에 완성되어 다음해 1853년 1월 19일에 로마의 아폴로 극장에서 초연, 호평을 받았다. - 라 트라비아타 그러나 두 달 뒤인 1853년 3월에 초연된 [라 트라비아타](춘희)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를 몇 가지 추려 보면, 병에 걸려 죽어가는 역할을 맡은 여주인공이 씨름 선수 같이 뚱뚱하고 건강한 여장부형이었고 오페라는 옛 이야기, 옛 의상으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의 이야기, 당시의 복장으로 상연했으며 오페라의 내용도 관객들의 찔리는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대 배경 등을 바꾸어서 크게 성공했다) - 가면무도회 다음 오페라 [가면무도회]는 스웨덴 왕의 암살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데 이 역시 검열에 걸려 수정해야 했고 예정보다 1년 늦게(1858년)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 정치참여 이러는 가운데서 1859년부터 통일 운동이 전 이탈리아에 번졌고 베르디도 통일 정부 수림을 위해 적극 참여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존경하던 카보우르가 초대 수상으로 취임하자 베르디는 수상의 권유로 초대 의원 선거에 출마, 거기서 당선되어 5년간 의정 활동을 펼쳤다. (카보우르가 갑자기 사망하자 정치를 그만둔다) - 아이다 정치를 그만 둔 후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69년(56세)에 이집트왕으로부터 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았다.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는 오페라였다, (이집트는 카이로에 오페라 극장을 건설했다) 베르디는 이 청탁을 두 번이나 사절했으나 결국은 조건부로 승낙한다. 그러나 보불전쟁(1870~1871) 때문에 의상, 가발, 소품을 프랑스에서 수입하지 못해 기념식 날짜(1870년)에 맞춰 주지는 못했지만 1871년 카이로에서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73년(60세) 문호 만조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레퀴엠]도 갖가지 비난을 불러 일으켰지만 브람스의 칭찬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잠재웠다. - 오델로 이미 60세를 넘긴 베르디는 그 뒤 수년간을 휴양으로 보냈는데 오페라는 더 이상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1879년(66세)에 신진 대본 작가인 보이토와 가깝게 사귀며 셰익스피어 [오델로]의 오페라 구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1886년(73세)에야 겨우 완성하여 1887년 2월 밀라노 스카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아이다] 이후 16년만의 작품이었다. - 팔스타프 그러는 동안에 두 사람은 셰익스피어 [팔스타프]의 오페라를 진행했는데 이전 작품과는 달리 즐거운 내용의 희극이다. 베르디의 희극은 이것을 포함하여 두 개 뿐이다. (다른 하나는 젊을 때 실패한 [하루만의 임금님]) 그래서 1893년(80세) 스카라 극장에서 초연되자 관객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80세 노익장에 놀랐고, 내용에도 놀랐다. 아이다, 오델로, 팔스타프 같은 후기 작품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새로운 오페라에 자극받아 관현악법을 비롯해 연극과 음악의 결합에도 더욱 신경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팔스타프]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