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비제는 1838년 10월 25일 파리의 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성악 교사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적인 가정에서 자란 비제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4살 때 피아노와 작곡의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9살 때는 이미 부모로서는 더 가르칠 게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음악적 성장을 보였습니다. 비제의 천재적인 음악성과 그를 음악가로 키우려는 부모의 열성은 파리 음악원 관계자를 감동시켜서 비제는 1848년, 채 10살이 되기 전에 10살로 제한된 음악원의 입학 연령 규정을 깨뜨리고 이례적으로 입학 허가를 받습니다.

비제는 19살 때까지 파리 음악원에 적을 두고 마르몽텔, 알레비, 지메르망, 케루비니, 구노 같은 대가들에게 피아노, 오르간, 작곡, 화성악 등을 배웠고 거의 모든 학과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재학시절부터 작곡을 시작한 비제는 당시 프랑스 신진 작곡가들의 등용문인 로마 대상을 목표로 주로 칸타타와 피아노 곡을 습작했습니다. 관현악곡인 경우에는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독창성이 빛나는 분야였는데요, 17살이던 1855년에 쓴 교향곡 C장조는 청년 비제의 재능과 뛰어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초기 시절의 수작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작곡가들에겐, 파리 음악원 입학, 로마 대상 수상, 그리고 오페라 발표, 이 3가지가 작곡가로 성공하는 코스였습니다. 조르주 비제 역시 이런 코스를 그대로 밟았죠. 교향곡을 발표한 다음해인 1856년에 비제는 오펜 바하가 제정한 오페레타 공모에 1막짜리 오페레타인 "미라클 박사"를 응모해서 오펜바흐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작품이 그해에 초연되면서 비제는 18살의 나이에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제는 로마 대상에 첫 도전을 합니다. 이때 제출한 작품은 칸타타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대상 아닌 2등상을 받았고 1년 뒤인 1857년에 재도전, 콜로비스와 콜로디트라는 작품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로마 대상 수상자는 로마에 유학가서 여러 가지 특혜를 받는 동시에 파리 예술협회에 1년에 한 작품씩을 보내야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비제는 19살이던 1857년 12월 말 파리를 떠나 다음해 1월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1860년 [22세] 7월말까지 약 3년간 로마와 나폴리 등지에 체류하면서 따뜻한 지중해 기후와 이탈리아 미술 작품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비제는 류머티스 관절염과 후두염 등으로 건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테디움, 오페라 "돈 코르피키오" 등 몇몇 작품을 썼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비제는 1861년 [23세]에 리스트로부터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파리에 들른 리스트는 연주하기 어려운 자신의 최신작을 비제가 초견으로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것을 보고 비제를 유럽의 3대 피아니스트 가운데 하나라고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비제는 이렇게 피아니스트로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작곡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비제는 스물 넷이던 1862년에 오페라 '태수 귀즐라'를 작곡해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상연하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무대에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뒤 작곡된 곡이 오페라 "진주조개잡이"인데 이 작품은 1863년 9월 초연되었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냉랭했고 흥행 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 [보충설명] 그 후에도 1865년(27세)에 작곡한 "이반뤼제"는 공연이 거절되었다. 1866년(28세)에 작곡한 "아름다운 퍼스의 아가씨"는 18회 공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한 비제는 이즈음 경제 사정도 별로 좋지 않아서 다른 여러가지 일들을 했습니다. 출판사의 부탁으로 구노, 모차르트, 생상스 같은 선배 작곡가들의 오페라와 기악 작품을 피아노 독주나 피아노 듀오곡으로 편곡했는데 그 분량은 매우 방대했습니다. 그는 이런 편곡 작업을 통해 선배 작곡가들의 양식을 배워나갈 수 있었고 오페라의 실패로 겪게 된 생계의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 피아노 레슨을 하거나 오페라 극장에서는 리허설이나 스코어 리딩을 위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비제는 일찍이 음악원 학생시절, 오페라 작곡가로서 그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아직 명성을 얻을만한 작품은 쓰지 못했습니다. 27이던 1865년에 작곡한 5막짜리 그랜드 오페라인 "이반뤼제"는 공연이 거절되자 비제 스스로 악보를 없애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초기 악보를 바탕으로 앙리 뷔세르가 편집한 것이죠. 이듬해 비제는 월터 스코터의 소설 "아름다운 퍼스의 아가씨"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제목의 새로운 오페라를 썼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선배 오페라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었던 비제의 이 작품은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했고 18회를 마지막으로 공연은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도 비제는 좋은 조건으로 악보 출판사와 계약을 맺게 되어 오랜만에 상당한 액수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869년 31살에는 스승 알레비 교수의 딸인 지느비아보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비제가 그토록 바라던 오페라 흥행의 성공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871년 33살의 비제는 새로운 오페라를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비용상의 문제로 거절당했죠. 대신 1막짜리 오페라인 자밀레를 이 극장에서 초연했지만 이 작품도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비제는 이제 알퐁스 도데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아를르의 여인"의 음악을 작곡하게 됩니다. 1872년 10월 1일 초연된 이 작품은 부드러움과 격렬함의 대조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비제는 다시 연극 음악에서 4편을 골라 대편성의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하나의 모음곡으로 만들어 공연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아를르의 여인" 제1모음곡이죠. 비제의 가까운 친구였던 에르네스트 기론은 비제가 죽은 후에 다시 4편을 골라 "아를르의 여인" 제2모음곡을 출판해서 오늘날 두 개의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르주 비제는 1874년 초,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된 "카르멘"의 대본을 파리 오페라 코미크로부터 받았습니다. 비제는 카르멘을 쓰던 때 후두염에 시달리며 건강이 좋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해 매달렸던 "카르멘"의 공연이 실패로 끝나자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조르주 비제는 후두염과 심장쇠약으로 카르멘이 초연 된 지 3개월 만인 1875년 6월 3일에 요양을 하던 부지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7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아까운 나이였죠. 비제의 장례식은 몽마르트에 있던 성삼위일체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구노, 토마 등에 의해 운구되어 파리의 페르라쉬에즈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카르멘은 비제의 음악적 열정과 천재성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대표작입니다. 한 비평가는 카르멘을 일컬어 "7월 14일의 음악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뜻은 이 작품이 프랑스 민중이 이루어 낸 혁명 기념일에 비유될 정도로 음악 사상 혁명적인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바그너와 리스트는 1875년 빈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파리에서, 카르멘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이 오페라가 10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죠. 그들의 예언은 정확했지만 안타깝게도 비제는 자신의 작품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카르멘이 초연된 지 석달 만인 1875년 6월 3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프로스페르 메리메가 쓴 같은 제목의 단편 소설을 기초로 했습니다. 루도 빅 알레비와 앙리 메이악이 대본을 썼는데 이들은 대본에서 돈 호세와 카르멘의 성격을 완곡하게 누그러뜨리는 한편 줄거리도 대폭 수정해야만 했죠. 그 이유는 그동안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해서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가는 오페라에만 익숙해 있던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관객들이 아직 메리메의 소설 속에 강조된 주인공의 성격과 정서를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정에도 불구하고 오페라는 처음에 공연되었을 때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청중을 화나게 했습니다. 도발적이고 도덕성이 결여된 여주인공 집시 아가씨와 점차로 타락해 가는 남자 주인공 등 무대 위의 사실적인 묘사들이 보수적인 파리 청중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죠. 이런 이유 등으로 비제의 카르멘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나라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습니다. 1878년에는 런던, 뉴욕, 이탈리아에서 상연되었고 이어서 독일의 오페라 극장까지 성황을 이뤄 베를린에서는 비제의 카르멘이 베버나 바그너의 오페라보다 더 자주 상연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파리는 1882년이 될 때까지도 냉담한 입장을 보이다가 그 후에서야 비로소 이 오페라에 매료되어서 비제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1938년까지 파리에서만 무려 2000회가 넘게 무대에 올려졌다고 합니다. ------------------------------- * 비제는 생상스보다 3년 후배로서 같은 시대의 프랑스 작곡가이지만 생상스는 86세로 장수한 반면 비제는 37세로 단명하고 말았다.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은 역사학자 메리메가 쓴 소설인데 그가 스페인 집시 소설을 쓴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집시는 유태인보다도 더 천대와 박해를 받아온 소수민족의 하나이다. (나라에 따라 신티, 마누슈, 히타노 등으로 불린다) 본래 서남 아시아에 살던 인도 아랍계 민족인데 살던 땅에서 내몰린 뒤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든 이들에게 정상 직업을 허락하지 않아 밑바닥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도둑질, 암거래, 밀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도피, 유랑생활을 계속했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정복하고 나서 남아메리카 주민들에게서 담배를 배운 후 유럽 곳곳에 대규모의 담배공장을 지었는데, "카르멘"의 배경이 된 1820년경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 담배공장의 노동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한다. 한여름에도 통풍이 되지 않는 작업장 안에 5백 명쯤 되는 여자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담뱃잎을 말았다. 이들은 신분이나 보수 면에서 최하층 노동자였으며 대부분 그 지방의 집시들이었다. 카르멘 역시 그들 중 하나였으므로 처음부터 고상한 도덕성이라고는 없다. 카르멘으로 표현되는 집시의 사랑은 언제나 기분파이며, 즐길 때는 철저히 즐기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수적인 돈 호세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사랑은 영원한 진리이다. 일단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성실하게 대하고 또 상대에게도 그러기를 요구한다. 카르멘은 그것을 견딜 수 없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없다. 원작 소설은 이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담으려 했느데 집시를 홀대한 유럽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꺼림칙했다. 이것을 비제가 공공연하게 무대에 올렸으니 당시로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여성 이미지와 도덕과 거리가 먼 도발적이고 도덕성 없는 여주인공 집시(카르멘)와 점차 타락해 가는 남자 주인공(돈 호세) 등이 보수적인 파리 관중들을 화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카르멘 역을 맡은 가수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연기를 펼쳤는데 이것이 관객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또한 당시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가족이 함께 공연 나들이를 하거나 맞선을 보는 데 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집시라는 하층민이 떼거리로 등장해 밀수를 하고, 점을 치고,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치정살인으로 끝나는 오페라를 봐야 하니, 관객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 현대에 와서도 전설적인 소프나노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는 [카르멘] 전곡 음반을 남겼고 독창회에서 이 오페라의 아리아를 노래하기도 했지만, 실제 오페라 카르멘 역은 거절했다.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