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전반에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낭만주의의 맥을 이은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라흐마니노프는 특히 우수에 찬 서정성이 넘치는 곡들을 썼는데 그는 1932년에 쓴 한 편지에서 음악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렸습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음악은 가슴에서 솟아나 오로지 가슴으로 얘기를 걸어온다. 그건 사랑이다. 음악이란 여신의 자매는 시의 여신,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슬픔." 음악에 대한 라흐마니노프의 이런 생각은 그가 작곡한 음악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북서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바실리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어머니는 장군의 딸로서 집안 명실상부한 러시아의 상류계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러시아 귀족 가문이 그렇듯이 라흐마니노프의 가족 역시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르카디는 뛰어난 아마추어 연주자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존 필드 문하에서 공부했고 집안에서는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고 하죠.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 또한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여서 그는 처음에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아버지도 물론 음악을 좋아해서 라흐마니노프는 유년 시절 아버지가 마련한 이런 저런 가족 음악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라흐마니노프는 7살 때 배우지도 않은 슈베르트의 가곡을 들어본 기억만으로 연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결국 피아노 교사에게 본격적으로 교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상류계층 출신이었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낭비가 심했던 아버지가 빚을 많이 지는 바람에 영지가 모두 경매에 붙여졌고 이렇게 가세가 기울자 1882년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상트 베테르부르크에 있는 좁고 누추한 아파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고통스런 나날이었죠. 더구나 이즈음 누이 두 명이 세상을 떠나면서 부모님 사이는 악화되었고 급기야 아버지가 집을 떠나는 가정 불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라흐마니노프는 장학금을 받고 상트 베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곳의 따분한 수업 방식은 그를 싫증나게 만들었고 1885년 기말 시험에서는 음악을 제외한 일반 과목에서는 모두 낙제하는 결과를 얻고 말았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형편없는 성적에 놀란 어머니는 급히 모스크바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사촌형 알렉산드르 질로티(Siloti)와 상의해서 아들을 모스크바로 보냈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로 가기 전 상트 베테르부르크에서 지낸 3년은 가정적으로는 우울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좋은 경험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처음 알게 되었고 할머니를 따라갔던 정교회에서 들은 성가와 종소리를 통해 음악에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를 갖기도 했죠.

1885년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로 가자 사촌형인 질로티는 그를 니콜라이 즈베레프 교수에게 데려갔습니다. 엄격한 교육으로 유명했던 즈베레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몇몇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살게 하면서 교습을 했는데 라흐마니노프도 이 과정에 합류했습니다. 즈베레프는 제자들에게 오전 6시까지는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연습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은 제복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다녔고 어학교육을 비롯한 예절교육도 철저히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술가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교적인 인물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죠. 그는 매주 일요일 오후엔 자신의 집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는 차이코프스키, 안톤 루빈스타인 등이 손님으로 참석했고 제자들은 이 유명한 음악가들 앞에서 연주를 하곤 했습니다. 상당히 부유했던 즈베레프는 이런 제자들 교육에 필요한 사례는 전혀 받지 않는 대신 그의 제자가 되려면 사회적 기반이 든든한 귀족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었다고 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처음 2년 동안 이런 수업 과정을 잘 견뎌냈고 그 덕분에 1887년 별 어려움 없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작곡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을 창조해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스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작곡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렇게 스승과 의견이 어긋나게 되면서 결국에는 지벨레프의 아파트에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지벨레프의 집을 나온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고모님 댁으로 갔고 1897년까지 10여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간혹 떠나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가 주로 살았던 곳은 고모님 댁이었죠. 그곳은 작곡가를 꿈꾸던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이때부터 매해 여름에는 고모님의 영지인 이바노브카에 가서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18살이던 1891년 라흐마니노프는 드디어 그의 작품번호 1번이자 최초의 대작인 피아노협주곡 1번을 완성했습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91년(18세) 봄, 질로티가 강의를 그만두자 음악원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음악원의 허락을 받아 일반학생보다 1년 앞서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시험을 치뤘는데요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과정 시험을 통과한데다 이어서 푸가 시험, 그리고 작곡 과정 졸업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그가 작곡 과정의 최종 과제물로 제출한 단막 오페라인 '알레코'는 겨우 3주만에 완성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를 포함한 다른 심사위원들로부터 대단히 좋은 평을 받았고 그는 음악원의 최고상인 금상을 받으며 졸업할 수 있었죠.

당시 라흐마니노프에게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면 그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즈베레프 교수와 화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지벨레프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출판사까지 소개해 주었고 그 출판사는 당장 젊은 작곡가의 오페라와 소품들을 계약하고 그후 20년 동안 계속 그의 작품을 출판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19살이던 1892년 여름에는 당시 젊은 음악가들이 주로 하던 개인교습이나 악보교정하는 일을 하면서 C#단조 전주곡을 포함한 피아노 작품도 썼습니다. 또한 그해 가을 피아니스트로 공식 데뷔를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해서 인기를 얻었지만 작품에 대한 정당한 저작권 수입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이득은 없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20살이 되던 1893년 초에는 그의 음악원 졸업작품인 오페라 알레코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무대에 올려져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도 이 공연을 보고 객석에서 일어나 젊은 작곡가의 작품에 큰 박수를 보냈죠. 이런 때문인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은 곧 모스크바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초청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그는 사촌누이인 '나타니아'에게 보낸 편지에 "모든 이들이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는 행복해." 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잠깐이었고 스승인 즈베레프가 세상을 떠난 데 이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해 주었던 대작곡가 차이코프스키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라흐마니노프는 즉시 그를 추모하는 슬픔의 피아노 3중주곡을 썼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전에 졸업 작품으로 쓴 오페라 알레코의 성공으로 작곡가로서의 장미빛 미래가 보이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891년(18세) 피아노협주곡 1번을 작곡한 이후에 쓴 대부분의 작품들이 생계 유지를 위한 소품에 불과했고 4년이 지나서 1895년(22세)에 의욕적으로 교향곡 1번을 쓰기 시작했지만 2년 뒤 (24세) 글라주노프에 의해 초연된 이 교향곡은 실패를 거뒀습니다. 그는 여기에 크게 상처를 받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두번 다시 이 작품을 듣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실패는 젊은 작곡가의 창작욕을 크게 위축시키고 말았죠. 라흐마니노프는 아주 이른 나이에 세상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인지 24살에 처음으로 큰 실패를 겪자 이로 인한 고통과 절망감을 극복하고 다시 작곡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겁니다. 다만 1897년과 1898년 사이에 (24 ~ 25세) 모스크바의 한 사설 오페라단에서 지휘를 맡으면서 알게 된 성악가 샬리아핀과 오랜동안 우정을 맺고 오페라에 대한 연구를 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이자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협주곡 2번이 발표되기까지 그는 얼마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1897년에 있었던 교향곡 제1번의 실패로 그는 작곡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까지 했기 때문이죠. 24살이던 그 때 이후 3년간 그는 단 하나의 음표도 자신있게 그리지 못할 정도로 실의에 차 있었는데 훗날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켜 졸도라도 한 느낌으로 멍한 나날들을 흘려 보냈다. 손이나 머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라흐마니노프는 26살이던 1899년 피아니스트로서 런던 데뷔 무대를 갖게 됩니다. 이 무대에서 그는 이미 자신이 피아니스트로서는 확고한 위치에 올라 있음을 확인했죠. 그리고 그는 피아노 협주곡을 다시 쓰고 싶은 욕구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작곡에 대한 공포심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아서 대문호 톨스토이를 찾아가 창작활동의 자극을 받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니콜라이 다르 박사를 찾아가 최면요법으로 치료를 받고서야 피아노협주곡 2번의 작곡을 시작해서 1901년(28세)에 완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협주곡 2번의 성공으로 창작활동의 위기를 극복한 라흐마니노프는 사촌이지만 그동안 사랑을 느껴오던 나탈리아 사티나와 1902년 4월에 결혼했습니다. 헌신적인 아내인 나탈리아와의 사이에는 딸 이리나와 타치아나가 태어났죠. 결혼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음악가로서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서는 다시 새롭게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고 지휘자로서의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쇼팽을 존경했던 라흐마니노프는 29살이던 1902년 여름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데 이어서 1903년(30세)에는 10개의 전주곡 작품 23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듬해(31세)는 알레코 이후 12년 만에 푸슈킨의 희곡 '인색한 기사'를 기초로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라흐마니노프는 31살 때인 1904년에 볼쇼이 극장의 정식 지휘자로 취임해서 3년 가까이 일을 하다가 러시아가 정치적인 문제로 혼란스러워지자 1906년(33세)에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갔습니다. 일종의 은둔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는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고 연주회와 오페라 관람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작곡한 교향곡 2번은 1908년(35세) 1월 26일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상트베제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서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습니다. 24살 때 교향곡 1번으로 음악인생에 쓰디쓴 실패를 맛봤던 라흐마니노프는 결국 10년이 지나 두번째 교향곡을 통해 드디어 교향곡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뒀던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33살이던 1907년부터 2년 뒤인 1909년(35세)까지 이곳저곳에서 물밀듯이 피아노 연주와 지휘 초청이 들어왔습니다. 1908년(34세)에는 전유럽을 순회하면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동안의 시간을 내 러시아로 돌아가서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작곡했습니다. 이 곡은 1909년부터(35세) 미국에서의 순회 공연을 위해 작곡한 곡이었는데 뉴욕에서 작곡자 자신의 연주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뒀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헌정받았던 당대 유명 피아니스트인 요제프 호프만은 라흐마니노프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45년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강철과 황금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손은 강철이고 가슴은 황금이었다. 그 위엄어린 존재를 생각만 해도 내 두 눈은 눈물에 젖는다. 이 숭고한 예술가에 대한 나의 찬사는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 그 자체이다." 1909년(35세)부터 해가 거듭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습니다.

그는 장인이 물려준 모스크바 남동부 이바노프카에 위치한 집에서 1917년까지 살았습니다. 한적한 시골에 통나무로 단출하게 지은 이 집은 조용한 가운데서 라흐마니노프가 고독과 자연을 벗삼아 작곡 활동을 하는데는 아주 적당했죠. 이바노프카에서 보냈던 시기에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활동은 한창 꽃을 피워서 그는 종교음악, 성요하네스 크리소스 토모스의 전래 그리고 저녁기도 같은 작품을 썼고 피아노곡인 전주곡집 작품 32, 회화적 연습곡 작품 33과 작품 39 가곡으로는 14개의 가곡 작품 34 등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1912년(38세) 가을에는 로마에 머물면서 에드가 알랑 포우의 시에 붙인 합창교향곡 종과 피아노소나타 2번의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독창과 합창, 그리고 관현악을 위한 시'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인 '종'은 1914년(40세)에 러시아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40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인 1915년부터 1917년까지 (41~43세) 전례없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내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러시아에 전쟁이 선포되었고 그는 이로부터 3년 동안 러시아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죠. 그러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1917년(43세)에는 결국 연주여행을 빌미로 러시아를 떠나게 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처음 그의 가족은 스톡홀름을 거켜 코펜하겐 등지에 머물면서 1년간 북유럽 여러 곳을 연주여행 하다가 결국 이듬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에서는 주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를 떠나온 뒤 한동안 작곡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망명생활의 중압감과 향수병도 그의 작곡활동을 가로막는 큰 요인이었죠. 마침내 라흐마니노프는 53살이던 1926년에 다시 창작을 시작했고 이듬해에 비로소 피아노협주곡 4번과 러시아 민요의 교향악적 편곡 작품을 발표했지만 평은 좋지 않았습니다. 1934년(61세) 봄, 라흐마니노프는 스위스의 루체른에 별장을 마련하고 자신의 이름 세르게이와 아내의 이름 나탈리아를 따서 세나르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1935년 미국 시민권을 받았지만 미국에서의 연주회가 없을 때면 루체른에 머물면서 작품을 썼습니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교향곡 3번 같은 작품이 바로 이곳에서 쓰여졌습니다.

1939년 8월 라흐마니노프가 다시 미국으로 간 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이후 그는 계속 미국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1943년에 쓴 교향적 춤곡을 끝으로 창작활동을 마감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1943년 1년으로 예정된 미국 순회연주를 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서 검사를 받았는데 병명은 암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미 암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된 상태였고 그해 3월 28일 그는 70번째 생일을 며칠 남기지 않은 채 비버리지 자택에서 타계했습니다. 녹스빌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지 겨우 6주도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이로써 1892년 피아니스트로서 첫 데뷔 이후 51년에 걸친 그의 연주 인생이 막을 내렸습니다.

음악가로서 라흐마니노프의 삶은 작곡가와 피아니스트 그리고 지휘자까지 이렇게 세 분야에 걸쳐 있었습니다. 비록 작곡가로서 당대의 평가는 부당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곡과 피아노, 지휘자 이 세 영역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능력에 대한 평가를 흐리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죠.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영화 밀회 라든가, 샤인 등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대중들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갔고 이로써 라흐마니노프는 많은 이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는 클래식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전에 그의 작품들은 평론가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뒤 미국으로 이주해서 작곡한 곡들이 더 그랬는데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주로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거장의 음악' 혹은 '피아니스트의 음악'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못했던 거죠. 음악 분야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가진 그로버 사전조차도 1954년 판에서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예술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작곡가로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음악의 짜임새는 악명 높다. 피상적이고 감정 과잉의 멜로디로 일관한다." 라구요. 그러다가 이후에 개정된 그로버 음악사전에서는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라흐마니노프를 제대로 평가하게 되었죠. 아마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오랫동안 폄하되었던 것은 20세기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이 다분히 19세기적이었던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20세기의 시대적 조류에 비추어 볼 때 비록 그의 음악이 구시대적이긴 해도 그만의 낭만적이고 내밀한 음악 언어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전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