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은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지만 드뷔시와는 또 다른 개성과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라벨이 세상을 떠난 직후 한 신문에 실린 글은 라벨이 어떤 음악을 썼던 작곡가였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리스 라벨은 끌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벽두에 프랑스 음악을 인상적으로 훌륭히 다듬어 놓은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일부러 꾸며내는 겉멋이 없어 듣는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라벨은 죽는 순간까지 자연스런 표현을 추구했으며 단 한 번도 감동을 유발시키기 위해 인위적인 장식을 하지 않았다."

라벨은 1875년 스페인 국경에 위치한 바스크 지방의 어촌, 시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 태생의 엔지니어였는데 어릴 때부터 음악가의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바스크 지방 출신으로 라벨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는 바스크 지방의 민요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훗날 스페인 음악에도 남다른 관심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벨 가족은 그가 태어난 3개월 만에 파리로 이사를 했고 라벨이 자라면서 음악가의 길로 가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들은 절대적인 격려와 후원을 보내주었습니다.

7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앙리기스 선생님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습니다. 이때 이미 라벨은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났을 때 그의 피아노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는 앙리기스 선생님에 이어 음악학교 교수인 에밀 데콩브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게 되었고 14살이던 1889년 6월에는 데콩브 교수의 문하에서 피아노를 배우던 24명의 제자들과 함께 에라르 홀에서 스승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무대에는 레이날도 안, 알프레도 코르토 같은 이도 포함되어 있었죠. 이것은 라벨의 첫 데뷔 무대로 이때 그는 모샬레스의 피아노 협주곡의 한 악장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889년 11월 14살의 라벨은 드디어 파리 음악원 피아노 예비반에 입학했습니다.

라벨이 파리 음악원의 피아노 예비반에 입학하던 1889년 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렸습니다. 만국박람회에서 연주된 자바의 가믈란 음악은 드뷔시뿐만 아니라 라벨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음악원에 입학하고 2년 뒤에 라벨은 상급반에 진학합니다. 상급반에 진학해서는 에밀 페사르 교수에게 화성악 과정을 배우는 한편 샤를르 드 베리오 클래스에서는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클래스에서 스페인 출신의 리카르도 비니에스를 만나서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죠. 비니에스는 라벨의 피아노 작품의 최고 해석자로 꼽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이 무렵 두 사람은 에릭 사티와 샤브리에의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라벨은 이 두 작곡가 말고도 드뷔시라든가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화려한 관현악법은 라벨이 관현악 색채의 마법사로 불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895년 20살이 된 라벨은 돌연 음악원을 그만 둡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 교내 피아노 콩쿨에서 입상하지 못한데다 화성학 과목에서도 낙제를 하는 바람에 학교 생활에 회의가 왔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라벨은 파리 음악원을 그만둔 지 2년만인 1897년 작곡가로서 도약할 결심을 하고 다시 파리 음악원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는 가브리엘 포레의 작곡 클래스에서 공부하며 앙드레 제달주에게서 대위법과 관현악법을 배웠는데 그는 이 교수에게 받은 영향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익힌 기교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달주 선생에게서 힘 입은 바 크다. 그리고 또 포레 선생이 예술가로서 해 준 충고는 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특히 당시 많은 학생들의 존경을 받던 포레는 라벨에게 매우 따뜻한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이런 덕분인지 라벨은 포레에게 배운 지 2년 만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죠. 포레는 라벨을 당시 지식인이 모이던 드 마르소 부인의 살롱에 소개해서 드뷔시, 댕디 , 미사제 등 당대의 음악가들은 물론 많은 지식인들을 만나는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라벨이 그나마 이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포레 덕분이었습니다. 라벨은 이런 포레의 애정에 보답해서 물의 희롱이란 작품을 헌정했을 뿐만 아니라 현악4중주곡에서는 "존경하는 스승 가브리엘 포레에게" 라는 글을 써넣어 경의와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50센티미터가 약간 넘는 키에 몸무게가 45kg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체구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동물과 어린이, 동화를 좋아하는 천진함을 가지고 있었고 작고 아기자기한 물건에 애착을 보였다고 하죠. 그런가 하면 클럽 같은 곳에서는 프랑스 삼지 담배를 입에 물고 재즈와 스페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합니다. 라벨은 앞서 소개한 드 마르소 부인의 살롱 모임 뿐만 아니라 에드몽드 폴리냑 공작 부인이 주관하는 상류 사회의 모임에도 참석했는데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는 바로 공작 부인의 의뢰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한 라벨은 젊은 세대들의 모임인 레자파슈의 일원이기도 했는데 라벨은 이 모임에서 활력과 자극을 얻곤 했습니다. 물의 희롱을 발표한 것도 이 모임에서였고 그 후에 작곡한 '거울'의 다섯번째 곡도 레자파슈 멤버들에게 헌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라벨의 작품은 이런 소규모 그룹의 모임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일반인이나 파리 작곡계를 주도한 작곡가나 비평가들로부터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그는 권위있는 작곡상인 로마대상에 상을 받음으로써 실력을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하고 1901년부터 4번이나 로마대상에 도전하지만 4번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01년 (26세): 2등 1902년 (27세): 낙방 1903년 (28세): 낙방 1905년 (30세): 연령 초과 첫번째 응모에서 2등을 받았을 뿐 두번째, 세번째는 탈락했고 한 해 걸러 마지막으로 1905년에 응모한 4번째에서는 나이를 이유로 자격이 없다면서 예선에서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프랑스 음악사에 유명한 전설이 된 이 사건을 두고 포레의 위로는 물론이고 대작가 로맹 롤랑까지도 라벨을 옹호하는 글을 쓰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에 의한 불공정한 심사였다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파리 음악원장 사임하게 됨) 라벨은 로마대상은 못했지만 오히려 유명해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 라벨은 10년 동안 아주 많은 작품들을 완성했습니다. 피아노 작품집 '거울'과 페로의 동화를 기초로 한 피아노 연탄곡 '어미 거위' 오페라 '스페인의 한 때',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다프니스와 클로에', 쇤 뵈르크의 영향으로 작곡된 '스테판 말라르메의 3개의 시', 관현악곡 '스페인 랩소디'와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곡들입니다. 삼십대에 접어들어 작곡가 라벨의 명성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에까지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14년, 39살인 그에게도 제1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습니다. 라벨은 예술가도 조국이 처한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군에 자원 입대합니다. 하지만 체중 미달로 입대가 거부되었고 대신 가까스로 운전병으로 복무하게 되죠. 하지만 그 운전병 활동도 병이 나는 바람에 1년만에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전쟁의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전쟁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위해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했죠. 전쟁중이던 1917년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라벨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작곡에 대한 의욕마저 잃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하죠. 그 작품은 '라 발스(La Valse)'라는 곡이었는데 디아길레프는 이 곡이 발레에 적합하지 않다고 상연을 거절하고 맙니다. 이것이 라벨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던지 라벨은 디아길레프와 결별하고 5년 뒤에 몬테카를로에서 우연히 디아길레프를 만나자 결투를 신청했을 정도라고 하죠. 하지만 '라 발스'는 컨서트 홀에서 연주되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라벨은 전쟁이 끝나고 1920년, 프랑스 정부에서 주려는 '레지옹 드뇌르'훈장의 거부를 둘러싸고 잡음이 일자 (로마대상 때의 불신 때문에 훈장 거부) 더 이상 파리에서 활동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파리에서 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몽포르라모리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19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1920년대 이미 유럽에서 명성이 확고해진 그는 여러 나라에서 초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922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 만난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옐리 다라니를 위해 2년 뒤 찌간느를 완성하여 초연하기도 했고 1928년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갔을 때는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도 라벨은 그의 대표작 '볼레로'를 썼고 이어서 피아노 협주곡과 '왼손을 위한 협주곡' 같은 걸작들을 작곡했습니다.

라벨은 쉰 일곱이던 1932년, 피아니스트 마르게리트 롱과 함께 유럽의 20개 도시를 순회하는 힘든 연주여행을 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그해 10월 파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부상이 별로 심해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 후 사고의 후유증으로 건강히 심하게 악화되었죠. 불면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했고 얼마 후에는 실어증 등 두뇌질환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다행히 휴식을 취한 뒤 잠시 건강이 회복되어서 1933년 11월에는 마르게리트 롱과 함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고 볼레로도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건강은 자신의 이름을 쓰기 힘들 정도로 다시 나빠졌습니다. 1937년 라벨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뇌수술을 했지만 결국 깨어나지 못한 채 12월 28일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라벨은 어린이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가서 '장'과 '미미'와 즐겨 놀았다. 그리고 1908년 이 아이들을 위해 음악 선물을 완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피아노 연탄곡 모음곡 《어미 거위》이다. (연탄곡 : 한 대의 피아노에서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기법으로 오손도손 정겹게 선율을 만들어 나간다). 라벨은 몽상적이면서도 독특한 유머 감각이 있어서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해 동화를 음악 소재로 삼았다. (프랑스 동화집의 특징은 어미 거위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미 거위"는 이야기꾼을 상징한다) 《어미 거위》는 5개의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위한 파반 - 난쟁이 - 파고다의 여왕 레드로네트 - 미녀와 야수의 대화 - 요정의 정원 어린이가 연주하도록 작곡했기 때문에 쉽고 간결하면서도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기발하고 신선한 선율도 종종 끼어든다. * 1912년(37세)에 발레음악으로 상연하기 위해 관현악곡으로 편곡하면서 몇 곡을 추가했다.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하지만 오랜 연습으로 왼손 테크닉을 완성한다. 그래서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왼손용 작품을 의뢰했으나 대부분 자신이 없다고 사양했고 유일하게 라벨만 이 제의를 받아들여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를 작곡했다. (1931년) 라벨은 피아노 선율을 보강하려고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음색을 부각시켰다. 또 타악기를 치밀하게 배치해 야성적이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음이 풍부하다. 라벨은 전쟁 참상을 이 작품에 녹였다. - 도입부 : 고뇌, 어둡고 우울 - 행진곡풍 : 전쟁의 광기 - 재즈풍 : 비극의 잔상 (곡 전체) 2년 후인 1933년, 비트겐슈타인은 빈교향악단과 협연으로 이 곡을 초연했는데 절망을 견뎌낸 왼손의 선율은 청중 가슴을 뭉클하게 했고 절망에 빠진 피아니스트를 구해주었다. ☞ 친절한 해설 (엄청난 화제가 된 이 연주회 이후 두 손이 멀쩡한 사람들도 왼손 기량을 과시하기 위해 이 곡을 연주하곤 한다.)